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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살리는 프로젝트 제4권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 — 아랏의 산당에서 시작된 질문 1. 수많은 성지 가운데 가장 깊이 남은 아랏 필자는 그동안 성경과 교회사에 관련된 여러 지역을 찾아다녔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의 흔적을 찾아보았고, 로마를 비롯하여 그리스의 아테네와 고린도 등 사도들과 초대교회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여러 곳도 직접 돌아보았다. 2007년 7월 4일부터 11일까지는 이스라엘 성지를 방문하여 엘리야의 기적을 떠올리게 하는 갈멜산, 예수님의 변화산, 겟세마네 동산, 나사렛과 베들레헴, 길갈과 나사로의 무덤을 비롯하여 성경에서 수없이 읽어 온 여러 장소를 직접 밟았다. 그 어느 곳도 가볍게 지나칠 수 없는 곳이었다. 성경의 사건들이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실제 땅과 역사 속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을 몸으로 느끼게 하는 귀한 경험들이었다. 그러나 세계 여러 곳의 성경과 교회사 현장을 돌아보고 이스라엘의 수많은 성지를 다녀온 뒤에도 필자의 마음에 가장 오래, 가장 깊이 남은 곳은 뜻밖에도 화려하거나 웅장한 장소가 아니었다. 바로 텔 아랏, 곧 고대 예배 유적이 남아 있는 곳이며 필자가 이 책에서 ‘아랏의 산당’이라 부르는 자리였다. 갈멜산의 장엄함과 변화산의 감격, 겟세마네의 숙연함, 베들레헴과 나사렛의 기억, 소아시아 일곱 교회와 로마와 아테네와 고린도의 역사적 감동보다 아랏에서 느낀 비애가 필자의 마음을 더 오래 붙들었다. 그곳에서 지성소를 가리키는 “HOLY OF HOLIES”라는 표지가 필자의 눈을 붙들었다. 곧 ‘지성소’라는 뜻이었다. 거룩한 이름이었다. 그러나 그 글자를 바라보는 순간 필자의 마음에는 감격보다 오히려 깊은 비애가 밀려왔다. 왜 그랬을까. 그 질문은 텔 아랏을 떠난 뒤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에도, 다른 성지를 돌아본 뒤에도, 설교를 준비할 때에도, 교회의 현실을 바라볼 때에도 그 장면은 계속 필자의 마음속에 되살아났다. 거룩한 이름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실제로 그 중심에 계시는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반드시 첫 자리에 계시는가. 예배의 형식이 남아 있다고 해서 그 예배의 질서까지 바르게 서 있는가. 시간이 흐를수록 질문은 더욱 분명해졌고, 마침내 한 문장으로 모아졌다. “누가 하나님의 자리에 서 있는가.” 이 책은 바로 그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필자가 2007년 이스라엘 성지에서 직접 촬영한 아랏 산당의 사진을 이 책의 표지에 사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 사진은 단순히 책을 장식하기 위한 그림이 아니다. 필자에게 아랏은 과거 이스라엘의 실패만을 보여 주는 유적이 아니라 한국교회와 필자 자신을 다시 하나님 앞에 세운 질문의 현장이었다. 그 앞에서 필자는 “내 설교보다 하나님이 높으신가. 내 신학적 판단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높으신가. 내가 속한 조직보다 하나님의 뜻이 중요한가. 교회의 성공보다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 중요한가.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과 정치적 판단과 이념까지도 하나님의 말씀 아래 놓여 있는가”를 묻게 되었다. 그래서 이 표지 사진은 독자에게도 같은 질문을 건네는 하나의 증언이다. 당시 필자가 직접 촬영한 동영상 역시 그 현장을 보여 주는 기록으로 남아 있다. 2. 산당에서 시작된 질문 ― 거룩한 이름보다 중요한 것은 중심이다 오늘날 텔 아랏에서 발견된 이 예배 유적은 고고학적으로 유다 왕국 시대의 성전 또는 성소로 설명된다. 필자가 이 책에서 이곳을 ‘아랏의 산당’이라고 부르는 것은 단순히 하나의 고고학적 명칭으로 규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예루살렘 성전 밖에 존재했던 이 예배처를 바라보며 성경에서 반복하여 나타나는 산당의 문제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산당이 처음부터 똑같은 의미를 가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배의 질서를 세우신 뒤에도 백성들이 자기 편의와 정치적 필요와 관습을 따라 산당을 유지하고, 하나님께 드린다는 이름 아래 잘못된 예배와 혼합된 예배를 계속했을 때 산당은 심각한 신앙적 문제가 되었다. 문제는 단순히 높은 곳에 제단이 있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질서를 떠나 사람이 정한 방식으로 예배를 바꾸었다는 데 있었다. 사람은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은가”, “모두가 이렇게 하지 않는가”, “시대가 달라지지 않았는가”, “국가가 요구하는 일이 아닌가”,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지 않은가”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판단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앞서기 시작할 때 예배의 외형은 그대로 있으면서도 그 중심은 달라질 수 있다. 거룩한 이름은 남아 있는데 하나님께서 첫 자리에서 밀려날 수도 있다. 필자가 아랏에서 느꼈던 비애는 바로 이것이었다. 이스라엘에서 돌아온 뒤에도 아랏에서 받은 충격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때의 감정은 필자의 생각과 말씀 속에 계속 남아 있었다. 교회와 예배를 바라볼 때에도, 교회 지도자와 국가와 정치권력을 바라볼 때에도, 그리고 필자 자신을 바라볼 때에도 같은 질문이 따라왔다. “누가 하나님의 자리에 서 있는가.” 처음에는 고대 이스라엘의 문제처럼 보였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것은 오늘의 문제로 다가왔다. 하나님보다 사람이 앞설 수 있고, 돈이 앞설 수 있으며, 교회의 성장과 성공, 교단과 조직, 국가와 정치권력, 민족과 이념이 앞설 수도 있다. 그리고 가장 깊은 곳에서는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다. 산당은 결국 장소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자리의 문제였다. 하나님께 속한 첫 자리를 누가 차지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3. 2013년 1월 13일, 아랏의 질문이 다시 불붙다 그렇게 2007년 아랏에서 시작된 문제의식을 품고 지내던 중, 2013년 1월 13일 필자의 마음에 그 질문을 다시 강하게 일으키는 일이 있었다. WCC 제10차 부산총회를 앞두고 명성교회에서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대표회장 홍재철 목사, WEA 총회 준비위원장 길자연 목사, NCCK 총무 김영주 목사, WCC 총회 한국준비위원회 상임위원장 김삼환 목사가 WCC 제10차 부산총회의 성공적 개최를 위한 공동선언문을 발표하였다. 필자에게 이 사건은 단순한 교계 행사가 아니었다. 2007년 아랏에서 느꼈던 비애와 질문이 다시 불붙는 계기가 되었다. 교회연합은 중요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가 하나 되는 것 또한 중요하다. 그러나 연합이라는 이름도 하나님의 말씀보다 앞설 수 있는가. 종교간 대화와 타종교인에 대한 존중은 어디까지 가능한가. 복음의 유일성과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은 어디에 놓여야 하며, 교회연합과 진리는 어떤 관계에 있어야 하는가. WCC의 공식 신앙고백이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구주로 고백하고 있다는 사실과는 별개로, 필자는 에큐메니컬 운동의 실제 전개 과정에서 나타나는 종교간 대화와 종교혼합의 경계, 복음과 선교의 유일성, 교회연합과 진리의 관계에 대하여 심각한 신학적 우려를 가지고 있었다. 필자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2013년 1월 17일부터 WCC 반대운동을 시작하였다. 그 과정에서 단순히 성명을 발표하거나 집회에 참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정부가 WCC 제10차 부산총회에 지원하기로 한 예산의 집행을 중지시키기 위하여 직접 법원에 가처분을 신청하였으며 문화체육관광부를 찾아가 정부의 예산 지원에 항의하는 시위도 벌였다. 또한 WCC고발운동본부를 만들고, accusation.kr과 wcc반대.com을 통하여 관련 자료와 필자의 문제의식을 지속적으로 알려 왔다. 그러나 이 책에서 중요한 것은 필자가 얼마나 오랫동안 WCC 반대운동을 했는가를 자랑하는 데 있지 않다. 법원에 가처분을 신청했다는 사실이나 문화체육관광부를 찾아가 항의했다는 사실, 어떤 조직을 만들었다는 사실 자체가 이 책의 중심도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2007년 텔 아랏에서 시작된 질문이 2013년 한국교회의 현실 앞에서 다시 불붙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질문은 WCC를 향해서만 머무를 수 없었다. WCC를 반대하는 운동 자체도 하나님보다 앞설 수 있는가. 운동의 조직도 우상이 될 수 있는가. 그 운동의 지도자도 하나님의 자리를 침범할 수 있는가. 참여자의 숫자와 영향력과 성과가 하나님보다 중요해질 수 있는가. ‘나는 옳다’는 확신마저 자기 의가 될 수 있는가. 결국 질문은 필자 자신에게 다시 돌아왔다. “나는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 모시고 있는가.” 우상숭배를 반대하는 운동조차 이 질문을 잃어버리는 순간 또 하나의 산당이 될 수 있다. 4. 나라의 위기 앞에서 다시 교회를 돌아보다 2013년 이후에도 필자의 문제의식은 끝나지 않았다. 교회와 나라의 현실을 바라보면서 “누가 하나님의 자리에 서 있는가”라는 질문은 계속 다른 모습으로 필자 앞에 나타났다. 그러던 중 대한민국의 정치적 혼란이 극심해지고,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와 탄핵을 둘러싼 사태가 이어졌다. 필자는 탄핵에 반대하는 입장에서 모두 21차례의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여러 언론에 전면광고를 게재하고, 국회를 비롯한 여러 장소에서 기자회견을 열며 필자의 문제의식을 국민과 교회에 알리고자 하였다. 많은 시간과 비용과 노력을 들였지만, 그 과정이 지나간 뒤 필자는 노력에 비하여 성과가 너무도 미미하다고 느끼며 다시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 교회는 나라의 중대한 문제 앞에서도 그토록 무관심하고 소극적이었을까. 왜 많은 목회자들이 사회와 국가의 문제를 자기와 관계없는 일처럼 바라보았을까. 필자는 그 원인을 다시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동안의 활동을 돌아보며 오늘 대한민국이 겪고 있는 위기의 중요한 원인 가운데 한국교회의 책임이 있음을 절감하게 되었다. 또한 한국교회의 무기력과 침묵을 돌아보면서 그 중요한 책임 가운데 하나가 목회자들에게 있으며, 목회자들의 소극적인 태도 뒤에는 ‘정교분리’에 대한 왜곡된 이해가 깊이 자리하고 있다고 판단하였다. 실제로 일부 목회자들로부터 이런 말을 듣기도 하였다. “목사님, 정교분리도 모르세요. 왜 그렇게 나서세요.” 그 말을 들으면서 필자는 한국교회 안에 자리 잡은 정교분리에 대한 인식부터 다시 살펴보아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그리고 그 배경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일제강점기 신사참배를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정교분리 개념이 왜곡되어 사용된 문제도 다시 살펴보게 되었다. 교회가 바로 서기 위해서는 먼저 목회자들이 정교분리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해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그 문제의식에서 『정교분리의 재구성과 한국형 새 이론 7-E 모델』을 집필하였다. 그러나 정교분리를 바로 이해하는 것만으로 교회가 바로 설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더 근본적인 질문이 남아 있었다. 교회는 지금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 모시고 있는가. 5. 『교회가 살아야 나라가 산다』로 이어진 질문 정교분리의 문제를 바로 세우는 것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더 깊은 문제가 남아 있었다. 교회 자체가 살아 있는가. 교회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서 있는가. 교회가 사람과 돈과 권력과 조직보다 하나님을 먼저 모시고 있는가. 바로 여기에서 필자의 문제의식은 다시 2007년 텔 아랏으로 돌아갔다. 정교분리를 바로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교회가 누구를 첫 자리에 모시고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그래서 8·15 광복절을 맞이하면서 『교회가 살아야 나라가 산다』라는 제목으로 시리즈를 이어가기 시작하였다. 제1권 『새 덩어리가 되라』에서는 교회가 먼저 자신을 돌아보고 묵은 누룩을 버리고 새 덩어리가 되어야 한다는 문제를 다루었다. 제2권 『교회의 사명과 실천』에서는 회개한 교회가 어떻게 나라와 사회를 섬기고 그 사명을 실제 삶 속에서 실천할 것인가를 다루었다. 그리고 이 모든 질문을 더 깊이 거슬러 올라가면서 마지막에 다시 한 가지 근본적인 문제 앞에 서게 되었다. 왜 교회는 반복해서 무너지는가. 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사람과 돈과 권력과 국가와 이념과 조직을 하나님보다 앞세울 수 있는가. 왜 거룩한 이름 아래 또 다른 산당이 세워지는가. 그 질문의 마지막에는 2007년 텔 아랏에서 시작된 바로 그 질문이 있었다. “누가 하나님의 자리에 서 있는가.” 그래서 이 시리즈의 마지막 제4권을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라는 제목으로 집필하게 되었다. 결국 이 책은 갑자기 시작된 책이 아니다. 2007년 아랏에서 느꼈던 비애, 2013년 WCC 문제를 바라보며 다시 불붙었던 질문, 나라의 위기 속에서 교회의 무기력과 목회자들의 잘못된 정교분리 인식을 경험하며 얻은 문제의식, 그리고 『정교분리의 재구성과 한국형 새 이론 7-E 모델』과 『교회가 살아야 나라가 산다』 시리즈를 거치면서 오랫동안 하나의 질문을 따라온 결과이다. 그 질문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았다. “누가 하나님의 자리에 서 있는가.” 6. 남의 죄를 찾기보다 우리 자신을 돌아보다 우상숭배를 말하면 우리는 쉽게 다른 사람의 죄를 발견한다. 솔로몬과 여로보암의 잘못을 보고, 1938년 신사참배를 받아들인 한국교회의 실패를 보며, 북한의 지도자 우상화와 교권·정치권력·종교혼합의 문제를 비판한다. 그러나 이 책이 거기서 끝난다면 아랏에서 시작된 질문의 본질을 놓치게 된다.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나는 어떠한가.” 다른 사람의 지도자 숭배를 비판하면서 내가 지지하는 지도자를 절대화하고 있지는 않은가. 국가우상화를 비판하면서 내가 사랑하는 국가와 민족을 하나님보다 높이고 있지는 않은가. 종교혼합을 비판하면서 내가 가진 신학과 교단을 절대화하고 있지는 않은가. 교권을 비판하면서 내가 가진 권위와 영향력은 내려놓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가. 돈과 성공을 비판하면서 내 사역과 조직의 성과를 자랑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래서 이 책의 질문은 ‘그들이’에서 끝날 수 없다. 다니엘은 조상들과 왕들과 백성의 죄를 고백하면서 자신을 그 역사 밖에 두지 않았다. 그의 고백은 “그들이 범죄하였습니다”가 아니라 “우리가 범죄하였습니다”였다. 이것은 조상의 개인적인 죄책이 후손에게 자동으로 이전된다는 뜻은 아니다. 개인의 죄책과 공동체의 역사적 책임은 구별해야 한다. 그러나 부흥의 역사를 우리의 역사라고 말하면서 실패의 역사만 과거 사람들의 일이라고 밀어낼 수도 없다. 1907년 평양대부흥도 우리의 역사이고, 1938년의 신사참배도 우리의 역사다. 순교와 저항도 우리의 역사이며, 해방 이후의 회개와 갈등도 우리의 역사다. 이 책은 그 역사를 통하여 오늘의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고자 한다. 7. 기억은 회개를 위한 것이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역사적 비극을 기억한다. 그 대표적인 날 가운데 하나가 아브월 9일, 곧 티샤 베아브(Tisha B’Av)이다. 필자가 아브월 9일에 주목하는 것은 날짜 자체에 어떤 신비한 힘이 있다고 믿기 때문도, 숫자가 재앙을 일으킨다고 주장하기 때문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실패를 잊지 않는 기억이다. 성전의 파괴와 예루살렘의 비극을 기억하며 자기 역사와 신앙을 돌아보는 것이다. 필자는 한국교회에도 이러한 기억이 필요하다고 본다. 부흥만 기억해서는 안 되며 실패도 기억해야 한다. 감사할 것은 감사하고 회개할 것은 회개해야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필자는 ‘한국의 아브월 9일’은 유대인의 역사적 기억에서 교훈을 얻어, 한국교회가 자신의 실패를 기억하고 하나님 앞에서 회개와 새로운 순종으로 나아가기 위해 필자가 제안하는 신앙적·해석적 표현이다.” 한국교회의 실패를 잊지 않고 기억하며 다시 하나님 앞에 서자는 필자의 신앙적 표현이다. 이 기억은 오늘의 세대에서 끝나서도 안 된다. 과거의 죄책을 다음 세대에게 떠넘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같은 실패를 반복하지 않도록 신앙의 기준을 전하기 위해 다음 세대에도 정직하게 가르쳐야 한다. 부흥과 순교의 역사만이 아니라 교회가 잘못했던 역사도 함께 가르칠 때, 다음 세대는 무엇을 지켜야 하고 무엇을 경계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다. 8. 8·15의 은혜와 9·9의 경고 1945년 8월 15일 우리 민족은 일제 식민지배에서 해방되었고, 1948년 8월 15일에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선포되었다. 필자는 8·15를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날로 바라본다. 그러나 외적인 해방이 모든 문제의 해결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교회에는 신사참배의 역사를 어떻게 회개하고 정리할 것인가라는 과제가 남아 있었고, 한반도는 남과 북으로 갈려 서로 다른 정치체제가 만들어졌다. 1938년 9월 9일 평양에서 개최된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7회 총회에서는 신사참배를 받아들이는 결의가 이루어졌다. 1948년 9월 9일에는 북한 정권이 수립되었고, 2016년 9월 9일에는 북한의 제5차 핵실험이 있었다. 필자는 이러한 역사적 날짜들을 하나의 신앙적 경고와 기억의 표지로 바라본다. 8·15가 해방과 감사의 은혜를 기억하게 한다면, 9·9는 한국교회와 민족이 자신의 역사 속 실패와 경고를 기억하며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이러한 기억은 날짜 자체에 의미를 두는 데 있지 않고, 그 날짜에 새겨진 역사를 통하여 오늘의 신앙을 성찰하고 회개와 순종으로 나아가는 데 있다. 그러나 이것은 숫자 9나 9월 9일 자체에 신비한 힘이 있다는 뜻도 아니며, 1938년의 사건 때문에 정확히 10년 뒤 북한 정권이 세워졌거나 세 사건이 직접적인 역사적 인과관계로 연결된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날짜는 역사를 기억하게 하는 표지다. 8·15를 은혜와 감사의 기억으로, 9·9를 실패와 경고와 회개의 기억으로 바라보자는 것이다. 9. 회개는 십자가로 간다 회개는 죄책감에서 끝나지 않는다. 회개의 목적은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회개행위 자체가 하나님과의 화목을 이루는 근거는 아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의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다. 그래서 이 책이 말하는 길은 우상숭배에서 회개로, 회개에서 십자가로, 십자가에서 하나님과의 화목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화목은 사람과의 화해로, 사람과의 화해는 교회의 화해로, 교회의 화해는 민족의 화해로 나아가야 한다. 10. 해방에서 복음통일로 1945년의 해방은 큰 은혜였지만 민족의 완전한 회복은 아니었다. 분단이 남았고 6·25전쟁이라는 참혹한 민족의 상처가 이어졌으며, 북한에는 공산주의 체제와 지도자 우상화, 종교와 양심의 자유 억압이라는 문제가 남았다. 6·25전쟁에는 북한의 남침과 냉전체제, 국제정치와 군사적 요인이라는 분명한 역사적 배경이 있다. 본서는 그 역사적 사실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신사참배의 죄와 충분하지 못했던 회개의 역사를 돌아보고, 전쟁과 분단의 비극 앞에서 다니엘과 같이 남을 정죄하기보다 먼저 공동체의 죄를 품고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는 신앙적·신학적 질문을 던진다. 그러므로 필자는 해방의 원리가 민족의 화해와 복음통일을 향해 이어져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북한 정권과 북한 주민은 반드시 구별해야 한다. 북한 주민은 정권 자체가 아니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귀한 사람으로서 함께 회복되어야 할 동포다. 복음통일은 북한 주민의 존엄과 신앙·양심의 자유를 존중하면서, 복음과 진리, 회개와 화해, 사랑과 섬김으로 함께 회복되어 가는 통일을 지향한다. 교회의 사명은 복음과 진리, 회개와 화해, 사랑과 섬김에 있다. 신앙과 양심의 자유가 보장되고 인간의 존엄과 인권이 존중되며 복음이 자유롭게 전해질 수 있는 회복을 지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통일 이후에 무엇을 할 것인가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통일 이전부터 북한 주민을 정권과 동일시하지 않고 그들이 겪어 온 상처와 고통을 이해하며 섬길 준비를 해야 한다. 언젠가 문이 열릴 때 지배하려는 사람이 아니라 섬기려는 사람으로 갈 준비를 해야 한다. 그러나 통일마저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해서는 안 된다. 11. 복음통일도 마지막 목적은 아니다 ― 세계선교로 민족이 회복된다면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 사명은 세계를 섬기는 데까지 이어져야 한다. 그러나 세계선교도 새로운 산당이 될 수 있다. 한국교회의 교세와 재정, 선교사의 숫자, 교단의 확장, ‘선교한국’이라는 자부심이 하나님보다 앞서서는 안 된다. 신사참배와 분열과 전쟁과 민족의 상처를 경험하고 다시 회복된 교회라면 오히려 더 겸손하게 다른 민족을 섬겨야 한다. 힘이 있다면 지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기 위해 사용해야 한다. 12. 이 책이 걸어가는 길 이 책에서 다루는 아랏의 산당과 아브월 9일, ‘한국의 아브월 9일’, 8·15와 9·9, 신사참배와 6·25, WCC와 오늘의 산당, 그리고 복음통일과 세계선교는 서로 떨어진 별개의 주제가 아니다. 그 모든 주제를 관통하는 질문은 하나다. 하나님께만 속한 자리를 우리는 무엇에게 내어주었는가. 이 책은 그 질문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리를 다른 것이 차지하는 우상숭배와 예배질서의 전복을 드러내고, 한국교회가 그 죄를 남의 죄로만 돌리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도록 촉구하고자 한다. 정죄가 목적이 아니다. 회개가 목적이며, 회개의 끝은 하나님께 돌아가는 데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길은 하나로 이어진다. 우상숭배 → 신사참배 → 배도 → 심판과 분열 → 회개 → 십자가 → 하나님과의 화목 → 교회의 회복과 화해 → 민족의 화해 → 복음통일 → 국가적 회복 → 세계선교. 그러나 이 흐름은 하나님 앞에서 교회가 걸어가야 할 신앙적 방향을 제시한다. 회개와 화해, 복음통일과 세계선교의 모든 과정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정치와 군사, 외교와 경제, 국제정세의 현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교회가 걸어가야 할 신앙적 방향이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의 중심에는 반드시 하나님이 계셔야 한다. 교회도, 나라와 민족도, 통일도, 선교도 그 어느 것도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다. 13. 마지막까지 남는 질문 2007년 텔 아랏에서 시작된 질문은 이 책의 마지막까지 계속된다. “HOLY OF HOLIES.” 거룩한 이름만으로 충분한가. 교회라는 이름만으로 충분한가. 회개라는 이름만으로 충분한가. 나라 사랑이라는 이름만으로 충분한가. 복음통일이라는 이름만으로 충분한가. 세계선교라는 이름만으로 충분한가. 그 모든 것의 중심에 실제로 하나님이 계시는가. “누가 하나님의 자리에 서 있는가.” 사람인가, 돈인가, 권력인가, 국가인가, 민족인가, 이념인가, 교단인가, 운동인가, 자기 자신인가. 아니면 하나님인가. 이 질문은 다른 사람에게 먼저 던질 질문이 아니다. 필자가 먼저 그 앞에 서야 하고, 한국교회가 그 앞에 서야 하며, 모든 신앙인이 그 앞에 서야 한다. 하나님은 인간이 무엇을 해 드려야 비로소 하나님이 되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영원까지 하나님이시다. 문제는 우리가 삶과 예배 속에서 하나님께 속한 자리를 다른 것에게 내어주는 데 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아야 한다. 사람은 사람의 자리로, 돈은 도구의 자리로, 권력은 섬김의 자리로, 국가는 국가의 자리로, 정치와 이념은 그 본래의 자리로, 교단과 조직은 사명을 돕는 자리로, 자기 자신은 피조물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 속한 첫 자리는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한다. 산당을 허문다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단순히 무엇을 없애는 일이 아니라 무너진 예배의 질서를 다시 세우고, 하나님의 말씀을 최종 권위의 자리에 놓으며, 하나님께 돌아가는 일이다. 이 책의 처음과 마지막에 남는 질문은 하나다. “누가 하나님의 자리에 서 있는가.” 그 질문에 대한 이 책의 대답도 하나다.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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