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맺는말 ― 산당을 허물고 하나님께 돌아가자
맺는말 ― 산당을 허물고 하나님께 돌아가자

제1절 다시 아랏에서 ― 역사가 남긴 경고

이 책은 아랏에서 시작된 하나의 질문으로부터 출발하였다. 그곳의 산당 안에서 보았던 “HOLY OF HOLIES”라는 글자는 저자에게 쉽게 지나칠 수 없는 충격으로 남았다. ‘지성소’라는 거룩한 이름이 있었지만, 그 이름이 놓여 있던 자리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가 아니었다.

거룩한 이름과 왜곡된 예배가 한 공간 안에 함께 놓여 있는 모습을 보면서, 과연 거룩한 이름을 사용한다고 해서 그 예배의 중심까지 거룩하다고 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시작되었다. 이제 이 책의 긴 여정을 지나 다시 그 아랏의 산당 앞으로 돌아온다.

이스라엘의 산당과 우상숭배에서 시작하여 한국교회의 신사참배와 역사적 실패를 돌아보고, 회개와 화해, 교회의 회복과 민족의 화해, 복음통일과 세계선교에 이르기까지 걸어왔지만 처음의 질문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모든 내용을 지나온 지금 그 질문은 더욱 분명해진다.

누가 하나님의 자리에 서 있는가. 이 질문은 이 책의 처음에 있었고 마지막에도 그대로 남는다. 아랏의 산당은 단순히 과거의 종교생활을 보여 주는 고고학 유적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오늘 우리의 신앙을 비추어 보는 거울이 된다. 거룩한 장소가 있고, 거룩한 이름을 사용하며, 거룩해 보이는 의례가 행해진다고 해서 그곳의 모든 것이 자동으로 하나님 중심의 예배가 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장소의 명칭이나 외형이 아니라 실제로 누가 중심에 있는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중심에 계시지 않는다면 아무리 거룩한 이름을 붙이고 종교적 형식을 갖추어도 그것은 또 다른 산당이 될 수 있다. 바로 이 점에서 아랏의 산당은 과거 이스라엘의 문제만이 아니라 오늘의 교회에도 똑같은 질문을 던진다.

오늘 우리의 교회와 예배와 운동과 사역의 중심에는 과연 하나님이 계시는가. 이것이 아랏 산당이 오늘까지 남겨 주는 질문이다. 성경의 역사를 따라가 보면 산당의 문제는 한 시대에 한 번 나타났다가 사라진 사건이 아니었다. 가나안의 산당이 있었고, 솔로몬 시대에도 산당이 세워졌으며, 여로보암은 북이스라엘의 종교질서를 자신의 정치적 목적에 맞게 다시 구성하였다.

북이스라엘의 우상숭배는 반복되었고 남유다 역시 그 위험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다. 산당을 제거하지 못한 결과는 단순히 몇 개의 잘못된 종교시설이 남아 있었다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었다.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예배 안에 다른 가치와 다른 신앙이 섞여 들어오면서 신앙의 혼합이 일어났고, 마침내 예배질서 자체가 변질되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하나님만을 섬기지 않는 모순이 그 안에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오늘의 우리 자신을 비추어 보는 교훈의 거울로 바라본다. 그들의 실패를 통하여 우리 자신을 살피고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을 찾는다. 그들이 무너진 지점을 보면서 오늘 우리 안에 같은 산당이 세워지고 있지는 않은지를 먼저 살펴야 한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사건이 펼쳐진 모리아는 하나님을 첫 자리에 모신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는 장소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은 단순히 사랑하는 아들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아들이며 그의 미래와 희망이 걸려 있는 존재였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요구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먼저 두는 순종의 길에 섰다.

이것이 모리아가 보여 주는 신앙의 본질이다. 하나님보다 더 소중한 것이 생기는 순간 그것은 우리에게 우상이 될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도, 소중한 소유도, 자신의 미래와 꿈도 하나님보다 앞설 수 없다. 모리아와 성전은 순종과 예배를 함께 생각하게 한다. 참된 예배는 단순히 형식을 갖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첫 자리에 모시는 데서 시작된다. 하나님께 첫 자리를 드리는 신앙, 그것이 모리아가 오늘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순종이다.

유대인의 역사에서 아브월 9일은 실패와 상실을 기억하는 날로 남아 있다. 성전의 파괴를 기억하고, 그 과정에 있었던 불순종과 공동체의 실패를 돌아보게 하는 기억의 표지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날짜 자체가 아니며, 특정한 날짜에 신비한 힘이 있다고 여기거나 그 날짜를 특별한 종교적 공식으로 받아들여서도 안 된다.

기억의 목적은 과거의 비극을 반복해서 되뇌는 데 있지 않다. 실패를 기억하면서 그 실패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를 돌아보고, 회개하며 다시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기억은 회개로, 회개는 새로운 순종으로 이어져야 한다. 자신의 실패를 숨기지 않는 신앙은 중요하다. 성공만 기억하는 공동체보다 실패를 정직하게 기억하고 그 실패에서 배우는 공동체가 오히려 더 건강할 수 있다.

아브월 9일의 기억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스라엘은 나라를 잃었고 성전을 잃었으며 결국 포로가 되었다. 자신들이 의지했던 국가도 무너졌고, 하나님을 예배하던 성전도 파괴되었다. 이런 엄청난 고난 앞에서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질문은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질문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누가 우리에게 이런 일을 했는가”만 묻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물어야 한다. 책임을 다른 사람과 다른 나라와 다른 시대에만 돌리는 데서 벗어나 자기 자신과 공동체를 하나님 앞에서 돌아보는 자기성찰이 필요하다. 다니엘의 기도는 바로 그 모습을 보여 준다.

그는 조상들의 죄와 민족의 실패를 말하면서 자신을 그 공동체에서 분리하지 않았다. “그들이 범죄하였습니다”라고만 하지 않고 “우리가 범죄하였습니다”라고 기도하였다. 고난은 단순히 원망의 이유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

바벨론 포로 이후의 역사는 절망으로만 끝나지 않았다. 고레스의 칙령을 통해 귀환의 길이 열렸고,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성전재건이 이루어졌다. 에스라는 말씀을 다시 세우는 일을 감당했고 느헤미야는 무너진 성벽과 공동체를 다시 일으키는 일에 헌신하였다. 그러나 회복은 단순히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땅을 되찾았다고 해서 신앙이 자동으로 회복되는 것도 아니며 건물을 다시 세웠다고 공동체가 저절로 새로워지는 것도 아니다. 예배가 다시 세워져야 하고 말씀이 회복되어야 하며 공동체가 하나님 앞에서 새롭게 정돈되어야 한다. 진정한 회복에는 언제나 새로운 순종이 요구된다. 과거의 자리를 되찾는 것이 회복의 전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이 회복의 목적이다.

한 번 회복되었다고 모든 문제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은 성전을 다시 세웠지만, 제2성전 시대에도 형식주의와 갈등이 다시 찾아왔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로마와의 유대전쟁이 일어났고 결국 성전은 다시 파괴되었다. 이 역사는 회복보다 더 어려운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 준다. 그것은 회복을 지키는 일이다. 한 번의 회개와 한 시대의 부흥이 다음 세대의 신앙을 자동으로 보장해 주지 않는다.

앞선 세대가 경험한 은혜가 다음 세대의 순종을 대신해 줄 수도 없다. 그러므로 교회는 과거의 회복과 부흥을 자랑하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된다. 매 시대마다 다시 말씀 앞에 서고, 다시 하나님을 첫 자리에 모시며, 새롭게 순종해야 한다. 한 세대의 회복은 다음 세대에게 유산이 될 수 있지만 그들의 순종 자체를 대신할 수는 없다.

제2절 한국교회의 실패와 해방, 분단의 기억

한국교회 역사에서 신사참배는 국가가 예배의 영역 안으로 들어온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당시에는 신사참배가 종교행위가 아니라 ‘국민의례’라는 논리가 제시되었지만, 명칭이 그 행위의 본질을 바꾸어 놓을 수는 없었다. 결국 공교회가 신사참배를 수용하는 결정을 내렸고 이를 거부한 이들은 투옥과 고난, 순교를 감당해야 했다. 신사참배의 핵심 문제는 예배질서의 전복에 있었다.

하나님께만 드려야 할 경외와 충성의 자리에 국가와 천황이 들어오면서 하나님께 속한 첫 자리가 침해되었다. 문제는 단지 일본의 신사를 향해 절을 했다는 외형적 행위에만 있지 않았다. 하나님보다 국가와 권력이 앞서는 질서를 교회가 받아들였다는 데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그러므로 신사참배의 역사를 기억하는 목적은 오늘 우리 자신을 살피고 같은 본질의 우상이 다른 모습으로 들어올 때 분별하며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기 위한 데 있다. 국가와 이념과 권력과 지도자가 다시 하나님의 자리를 요구하지 않는지 교회는 끊임없이 경계해야 한다. 1938년 9월 9일 평양에서 제27회 총회가 개회되었고, 그 회기 중 한국교회가 신사참배를 수용하는 결의를 하였다.

여기에서 개회일과 실제 결의가 이루어진 날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두 사건은 정확하게 구별하여 기억해야 한다. 또한 9월 9일이라는 날짜 자체를 신비화해서도 안 된다. 특정 숫자나 날짜에 어떤 초월적인 힘이 있어서 역사를 결정했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날짜는 그날 일어난 사건을 기억하게 하는 표지일 뿐이다.

우리가 1938년의 9·9를 기억하는 이유는 한국교회의 실패를 감추지 않기 위해서다. 교회가 국가의 압력 앞에서 어떤 선택을 했는지를 정직하게 기억하고, 오늘 다시 비슷한 상황이 찾아올 때 같은 타협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다. 과거의 실패를 기억하는 것은 현재의 순종을 위한 경고다. 1945년 8월 15일은 일제의 식민지배가 끝나고 광복을 맞은 날이다.

억압받던 민족에게 해방이 찾아왔고 한국교회 역시 신앙의 자유를 다시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감옥에 갇혀 있던 출옥성도들이 돌아왔고 공개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길도 다시 열렸다.

이 해방을 기억할 때에는 독립을 위해 희생한 수많은 사람들의 수고를 잊어서는 안 되며, 당시의 국제정세와 세계사적 조건도 함께 보아야 한다. 동시에 신앙의 눈으로는 그 역사 속에서 베풀어진 하나님의 섭리에 감사한다. 어느 한 요인만으로 광복의 모든 의미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여러 역사적 조건을 인정하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8·15는 감사의 기억이다. 그러나 감사는 곧 책임으로 이어져야 한다.

해방을 받은 민족과 신앙의 자유를 되찾은 교회가 그 자유를 어떻게 사용해 왔는지를 하나님 앞에서 돌아보아야 한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고, 같은 해 9월 9일에는 북한 정권이 수립되었다. 하나의 민족 안에 서로 다른 정치체제가 자리 잡으면서 분단은 더욱 제도화되었다. 남과 북의 역사는 이후 크게 다른 길을 걸었다. 대한민국에서는 자유와 종교의 자유가 제도적으로 보장되는 체제가 세워졌고, 북한에서는 전체주의 체제 아래 종교의 자유가 억압되는 현실이 형성되었다.

이 차이는 오늘까지 한반도의 역사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 체제의 출범을 감정이나 선전의 언어로만 기억해서는 안 된다. 1948년의 두 역사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그 결과가 오늘의 한반도와 교회에 무엇을 남겼는지를 냉정하게 돌아보아야 한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전쟁이 시작되었다. 수많은 군인과 민간인이 희생되었고 수많은 가족이 남과 북으로 갈라져 이산가족이 되었다. 국토는 폐허가 되었으며 그 상처는 한 세대를 넘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6·25전쟁을 이해할 때에는 정치적·군사적·국제정치적 원인을 분명하게 보아야 한다. 실제 역사에서 일어난 전쟁의 원인을 흐리거나 모든 것을 단순한 종교적 설명으로 환원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교회는 역사적 원인을 살피는 것과 동시에 자기 공동체를 하나님 앞에서 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의 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았는지를 묻는 것이다. 그렇다고 전쟁을 특정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심판이라고 단순화해서도 안 된다. 전쟁을 기계적인 신학적 인과공식으로 만드는 것은 신중하게 경계해야 한다.

2016년 9월 9일 북한은 제5차 핵실험을 실시했다. 북한의 핵개발은 이미 그 이전부터 진행되어 왔지만, 이 핵실험은 핵무장 고도화가 계속되고 있음을 다시 확인시켰고 한반도의 안보위기를 더욱 심각하게 만들었다. 이 책에서 1938년과 1948년, 그리고 2016년의 9·9를 함께 언급한다고 해서 세 사건 사이에 직접적인 역사적 인과관계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숫자 9에 어떤 신비한 의미나 힘이 있어서 역사를 움직였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각각의 사건은 서로 다른 역사적 배경과 원인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이러한 날짜들을 함께 기억하는 것은 신앙적 성찰을 위해서다. 국가와 지도자와 군사력이 절대화되고, 그것들이 하나님께 속한 자리를 대신하려 할 때 인간의 역사 속에 어떤 위험이 나타나는지를 돌아보기 위함이다.

8월 15일도, 9월 9일도, 아브월 9일도 그 날짜 자체에 신비한 힘이 있는 것은 아니다. 숫자가 역사를 지배하는 것도 아니며 특정 날짜가 인간과 국가의 운명을 자동으로 결정하는 것도 아니다. 날짜는 기억의 표지다. 그 날짜에 있었던 사건을 기억하고, 그 사건이 남긴 교훈을 배우며, 그 기억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기 위한 것이다. 날짜 자체를 신앙의 대상으로 만드는 순간 기억은 또 다른 우상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날짜가 아니라 그 날짜를 통해 우리가 무엇을 기억하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이다. 역사의 기억은 결국 하나님께 돌아가는 방향으로 이어져야 한다.

이 책에서 여러 역사와 날짜를 돌아본 목적은 역사공부 자체에 있지 않다. 날짜들을 수집하거나 사건 사이에서 신비한 연결을 찾아내기 위한 것도 아니다. 더구나 과거의 사람이나 다른 민족과 집단을 정죄하기 위한 자료를 만들려는 것도 아니다. 역사를 기억하는 이유는 성찰하기 위해서다. 성찰은 회개로 이어져야 하고 회개는 다시 순종으로 이어져야 한다.

과거의 실패를 알면서도 오늘의 삶이 바뀌지 않는다면 그 기억은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한다. 따라서 역사를 바라보는 마지막 방향은 하나님께 돌아가는 데 있다. 역사를 통해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 전에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순종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목적이다.

제3절 “그들이”가 아니라 “우리가” ― 십자가와 화해의 길

이스라엘의 죄를 말할 수 있고 일본의 죄를 말할 수 있으며 북한 정권의 죄와 과거 지도자들의 잘못도 말할 수 있다. 역사의 잘못을 잘못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이 진실은 아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죄를 밝히는 일만 계속하다 보면 자신은 심판자의 자리에 서고 상대방만 죄인의 자리에 세우기 쉽다. 그렇게 되면 회개의 방향이 다시 다른 사람에게만 향하게 된다. 가장 먼저 돌아볼 사람은 우리 자신이다.

그리고 그 공동체 안에 있는 바로 나 자신이다. “그들이 무엇을 잘못했는가”를 묻는 것과 함께 “나는 하나님 앞에서 어떠했는가”를 묻는 것이 회개의 시작이다.

다니엘의 기도는 공동체적 회개의 중요한 본을 보여 준다. 그는 자신보다 앞선 세대가 저지른 죄와 민족의 역사적 실패를 알고 있었지만, 그 역사를 자신과 아무 관계 없는 과거의 사건처럼 취급하지 않았다. 그는 “그들이 범죄하였습니다”라고 자신을 분리하기보다 “우리가 범죄하였습니다”라고 하나님 앞에 섰다.

이것이 조상의 개인적 죄책이 아무 조건 없이 후손에게 자동으로 이전된다는 뜻은 아니며, 개인의 죄책과 공동체의 역사적 책임은 구별되어야 한다. 다만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역사를 자기 공동체의 역사로 정직하게 받아들이고, 그 역사가 남긴 결과와 책임을 하나님 앞에서 성찰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회개는 “그들”에서 “우리”로 이동한다. 책임을 외부로 돌리는 자리에서 자기성찰의 자리로 나아간다. 공동체의 회복은 바로 이러한 정직한 고백에서 시작될 수 있다. 그러나 회개 자체가 구원의 값은 아니며, 많은 눈물을 흘린다고 해서 그 눈물이 속죄의 근거가 되는 것도 아니다. 인간이 아무리 깊이 반성하고 자신의 잘못을 고백한다 하더라도 자기 공로만으로 하나님과 화목할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회개는 결국 십자가로 간다.

십자가에는 그리스도의 피가 있고, 죄를 위한 속죄가 있으며,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용서가 있다. 인간이 자기 죄를 발견하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죄를 담당하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참된 회개는 자기 의를 세우지 않는다. 자신의 눈물이나 결단을 의지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붙든다. 회개가 절망으로 끝나지 않는 이유도 바로 십자가에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가 있기 때문이다. 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깨뜨렸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를 통하여 화목의 길을 여셨다.

고린도후서 5장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셨음을 말하고, 에베소서 2장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막힌 담을 허물고 화평을 이루는 길임을 보여 준다. 화해는 인간이 먼저 하나님께 올라가 이루어 낸 결과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화목의 길을 여셨다. 그러므로 모든 회복의 출발점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먼저 회복되는 데 있다.

하나님과의 화목 없이 인간 사이의 화해만을 말하면 그 화해는 쉽게 정치적 타협이나 감정적 봉합으로 끝날 수 있다. 십자가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한 사람이 비로소 다른 사람과의 화해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 하나님께 용서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을 용서할 이유를 갖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책임을 갖게 된다. 하나님과의 화해는 개인의 내면에만 머물지 않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로 흘러가야 한다.

그 화해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교회와 교회, 교단과 교단, 세대와 세대 사이에도 필요하며 오랜 분단과 적대를 겪어 온 남과 북 사이에도 필요하다.

그러나 화해가 진리를 포기한다는 뜻은 아니다. 잘못을 잘못이 아니라고 말하거나 죄를 덮어 두는 것이 사랑도 아니다. 화해는 진실을 외면하지 않으며 사랑은 죄를 숨기지 않는다. 진실과 사랑이 함께 갈 때 비로소 성경적 화해가 가능하다. 하나님과 화해하고 서로 화목한 교회가 나라를 향해 감당해야 할 사명은 지배가 아니라 섬김이다.

교회가 국가를 장악하거나 신정국가를 세우는 것이 목적이 아니며 정치권력을 차지하는 것이 교회의 최종 사명도 아니다. 교회는 진실과 정의를 세우고 사랑을 실천하며 교육과 구제를 통해 이웃을 섬겨야 한다. 또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책임 있는 시민으로 살아가도록 돕는 일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러한 섬김은 교회가 국가 위에 군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사회 속에서 실천하기 위해서다.

살아 있는 교회는 변화된 사람을 세운다. 그리고 변화된 사람은 자신의 가정과 일터와 사회에서 책임 있게 살아가며 나라를 섬긴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가 살아야 나라가 산다는 말은 교회가 나라를 지배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복음으로 변화된 사람이 나라를 바르게 섬겨야 한다는 뜻이다. 통일은 제도만 합친다고 완성되는 문제가 아니다.

분단은 오랜 시간 동안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와 적대를 남겼고, 서로 다른 체제와 경험은 깊은 불신을 만들어 놓았다. 따라서 통일은 제도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마음의 문제이며 역사적 상처와 적대를 어떻게 넘어설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 과정에는 진실과 책임이 필요하다. 그러나 진실과 책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용서와 사랑이 함께 있어야 한다. 화해는 과거를 없었던 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직면하면서도 새로운 관계로 나아갈 길을 찾는 것이다. 또한 북한 정권과 북한 주민을 구별해야 한다. 정권의 잘못을 비판하는 것과 주민 전체를 적대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북한 주민 역시 존엄과 자유를 누려야 할 같은 민족의 구성원이며 함께 회복되어야 할 사람들이다. 이러한 화해가 이루어질 때 비로소 통일을 위한 토양도 만들어질 수 있다. 통일은 끝이 아니다. 오히려 회복된 민족에게는 새로운 책임이 시작된다. 남과 북이 가진 인적·물적 자원만이 아니라 분단과 전쟁을 겪은 경험, 박해와 고난을 견뎌 온 경험, 그리고 다시 회복되어 가는 경험까지도 세계를 섬기는 자원이 될 수 있다.

그 섬김은 복음에만 머물지 않는다. 평화를 위해 일하고, 의료와 교육으로 필요한 사람들을 돕고, 갈등과 분열의 현장에서 화해의 길을 보여 주는 일까지 포함한다. 고난을 경험한 민족이 다른 민족의 고난을 외면하지 않고 섬길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세계선교를 새로운 민족적 팽창의 기회로 삼아서는 안 된다. 한국의 영향력과 교단의 세력을 넓히는 것이 선교의 목적이 아니다.

세계선교의 본질은 자신을 높이는 데 있지 않고 그리스도를 따라 겸손히 섬기는 데 있다.

제4절 책은 끝나지만 질문은 끝나지 않는다 ― 열린 연구의 과제

이 자료들을 살피는 목적은 한민족의 기원을 성경의 어느 한 계보에 미리 맞추려는 데 있지 않다. 단 지파와 동방 이동에 관한 주장, 마니산 참성단과 성경의 제단을 비교하려는 연구, 고대의 여러 인물과 성경의 세계를 연결하려는 주장들은 각각의 자료와 역사적 배경을 따라 더 깊이 살펴볼 연구과제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러한 흔적과 전승과 유사성을 아무 의미 없는 것으로 일축할 필요도 없다. 중요한 것은 질문을 닫지 않는 것이다.

왜 우리 민족의 고대 전승 속에 하늘을 향한 제사의 기억이 남아 있는가. 왜 홍수와 새로운 시작을 떠올리게 하는 이야기들이 나타나는가. 왜 강화 마니산 정상에는 오래된 제천의 전승을 가진 참성단이 남아 있는가. 평양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해지는 고대 와당의 문자와 관련하여 제기되어 온 주장들은 무엇이며, 백두산과 고대 이스라엘을 연결하려는 자료들은 어디까지 확인될 수 있는가.

그리고 훗날 사도 도마의 동방 선교와 허황옥·가야를 둘러싼 전승과 연구는 이 긴 질문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아직 답을 더 찾아가야 할 질문들이 많다. 이 책은 그 가능성을 열린 연구의 과제로 남겨 둔다. 앞으로 고고학과 문헌학, 고대문자학과 역사학의 연구를 통하여 일부 연결고리가 신뢰할 만한 사실로 확인된다면, 사도 도마의 동방 선교 가능성과 근대 이후 선교사들의 희생, 한국교회의 부흥과 세계선교의 역사를 더 넓은 신앙적 질문 안에서 바라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결론을 미리 정해 놓아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과연 언제부터 이 민족을 바라보고 계셨는가. 저자는 그 답을 쉽게 단정하려 하지 않는다. 다만 만일 우리 민족과 한국교회가 오랜 은혜와 큰 사명을 받은 것이라면, 그 책임 또한 가볍지 않다. 과거의 흔적을 찾는 목적은 민족의 우월성을 증명하는 데 있지 않고,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다시 묻는 데 있다.

우리 민족의 고대 신앙과 상징 속에는 ‘셋’이라는 구조가 반복하여 나타난다.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해를 상징하는 삼족오가 등장하고, 우리 민족의 전승 속에는 삼신에 관한 여러 형태의 기억이 남아 있다. 후대의 전승에서는 환인·환웅·단군을 삼신으로 연결하기도 하였고, 천·지·인의 삼신을 말하는 신앙 형태도 나타났다. 이러한 ‘셋’의 구조는 그 자체로 기독교의 삼위일체 교리와 같은 것은 아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는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한 기독교 고유의 신론이다. 다만 우리 민족의 여러 전승과 상징 속에 반복하여 나타나는 ‘셋’의 구조가 어떤 역사적·종교문화적 배경에서 형성되었는지는 별도의 연구 질문으로 살펴볼 가치가 있다.

왜 우리 민족의 오래된 종교적 기억과 상징 속에는 이처럼 ‘셋’의 구조가 반복하여 나타나는가. 그것이 단순한 숫자의 우연인지, 아직 충분히 밝혀지지 않은 고대 종교문화의 흔적인지는 더 연구해야 한다. 지금 당장 신학적 결론을 내릴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삼신이나 삼족오를 삼위일체와 동일시하지 않으면서도, 그 역사적·종교문화적 배경을 열린 자세로 살펴보는 것이다.

그리고 어떠한 연결 가능성이 확인되더라도 그것은 민족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근거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더 엄중하게 묻는 책임의 근거가 되어야 한다.

제5절 저자에게 남아 있는 현장탐사의 꿈

저자는 오래전부터 한 가지 연구의 꿈을 품어 왔다. 여건과 환경이 허락된다면 우리 민족의 고대사와 성경의 고대 세계 사이에 제기되어 온 여러 연결 가능성을 책상 위의 자료만으로 판단하지 않고, 관련된 세계 각국의 현장을 직접 찾아가 확인하고 싶다는 것이다.

노아 홍수 이후 인류의 이동,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지파에 관한 여러 주장, 마니산 참성단과 평양의 유물·문자, 백두산 관련 자료, 삼족오와 삼신 전승, 사도 도마와 허황옥·가야의 흔적까지 현장과 문헌을 함께 비교해 보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목적은 미리 정한 결론을 증명하는 데 있지 않다. 한민족의 기원을 특정 지파에 미리 맞추거나 우리 민족의 고대 신앙을 곧 성경의 신앙으로 단정해서는 안 된다.

확인되는 것은 사실로, 확인되지 않는 것은 가능성으로 남겨 두며 사실과 전승과 해석을 구별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부터 이 민족을 바라보고 계셨는가. 만일 언젠가 이러한 연구를 통하여 흩어져 있는 여러 흔적 가운데 일부라도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연결고리가 확인된다면, 그것은 우리 민족을 자랑하기 위한 자료가 아니라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오래되고 큰 것이었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자료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은혜가 크고 오래되었다면 우리가 감당해야 할 책임과 사명 또한 결코 가볍지 않을 것이다.

책은 끝나지만 질문은 끝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질문보다 더 중요한 질문이 있다. 그토록 큰 은혜를 받았다면, 오늘 우리는 하나님을 어디에 모시고 있는가.

제6절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아야 한다

교회는 중요하다. 대한민국도 중요하고, 통일과 민족도 중요하며, 선교와 조직과 지도자와 운동 역시 각자의 자리에서 필요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들이 아무리 중요한 가치를 가진다 해도 하나님보다 앞설 수는 없다. 첫 자리는 하나뿐이며, 하나님께 드려야 할 그 자리를 교회가 차지해도 안 되고 국가나 민족이 차지해도 안 되며 통일과 선교가 차지해도 안 된다.

좋은 것이라고 해서 언제나 우상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며, 하나님보다 앞서는 순간 좋은 것도 우상이 된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그것들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래 제자리에 두는 것이다.

우리가 허물어야 할 산당은 고대 이스라엘에 있었던 산당만이 아니다. 일본의 신사와 신사참배만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오늘 우리 안에도 얼마든지 새로운 산당이 세워질 수 있다. 돈이 산당이 될 수 있고 성공이 산당이 될 수 있다. 사람과 교권, 정치와 국가, 이념과 자기 자신도 하나님보다 앞서는 순간 산당이 된다. 신앙의 이름으로 시작한 것조차 하나님을 대신하면 우상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먼저 우리의 산당을 발견해야 한다.

발견한 뒤에는 그것이 산당임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인정하는 데서 멈추지 말고 허물어야 한다. 회개는 우상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하지만 실제로 그 우상을 내려놓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우상을 허문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것을 없애 버린다는 뜻이 아니다. 사람과 돈도 필요하고 국가와 민족, 교단과 조직도 각자의 역할이 있다. 문제는 그것들이 하나님께 속한 자리를 차지할 때 생긴다. 그러므로 사람은 사람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돈은 도구의 자리로, 권력은 섬김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국가는 국가의 자리에, 민족은 민족의 자리에 있어야 하며 교단은 교단의 자리에, 조직은 도구의 자리에 있어야 한다.

선교 역시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할 수 없다. 선교는 순종의 자리로 돌아가야 하고 자기 자신은 피조물의 자리로 내려와야 한다.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것, 그것이 회복이다.

예배의 첫 자리는 하나님께 속한다. 사랑의 첫 자리도, 충성의 첫 자리도, 경외의 첫 자리도 하나님께 속한다. 이것은 어떤 사람이나 국가나 이념이 대신 차지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사람을 존경할 수 있지만 예배할 수는 없다. 국가를 사랑할 수 있지만 국가에게 하나님께 드릴 충성을 줄 수는 없다. 이념이 사회를 이해하는 하나의 도구가 될 수는 있지만 신앙의 최종 대상이 될 수는 없다. 교회는 다시 하나님께만 예배해야 한다.

예배의 첫 자리를 하나님께 돌려드릴 때 비로소 다른 모든 것들도 자기 자리를 찾게 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판단을 한다. 개인의 판단도 필요하고 목회자의 판단도 필요하며 교단의 판단과 정치적 판단도 필요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어떤 인간의 판단도 신앙의 최종 기준이 될 수는 없다.

교회가 무엇을 믿을 것인가, 어떻게 예배할 것인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판단하는 최종 기준은 말씀이어야 한다. 사람의 경험이나 시대의 분위기, 정치적 이해관계가 말씀보다 앞설 수 없다. 그리고 여기에는 자기 자신도 예외가 아니다. 내가 옳다고 확신하는 해석이라 할지라도 말씀 앞에서 다시 겸손히 점검해야 한다.

자신의 해석을 절대화하는 순간 말씀을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자기 자신을 최종 권위의 자리에 올려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제7절 하나님께 돌아가자 ―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

회개의 본질은 방향을 돌리는 것이다. 단지 죄를 후회하거나 과거의 잘못을 기억하는 데 머물지 않고, 지금까지 향하고 있던 방향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 우상에서 돌아서야 하고 자기중심에서 돌아서야 하며 불순종에서 돌아서야 한다. 그리고 그 방향은 분명하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회개는 과거에만 머물지 않는다. 죄책감에 빠져 자신을 끝없이 정죄하는 것으로 끝나지도 않는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용서를 받고 회복을 경험하며 새로운 순종으로 나아가는 것이 회개의 열매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탕자의 비유는 하나님께 돌아가는 회개와 회복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여 준다. 아버지의 집을 떠난 아들은 모든 것을 잃은 뒤 비로소 자신의 처지를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잘못을 후회하는 데서 멈추지 않았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리라”고 결단하고 실제로 일어나 아버지께로 돌아갔다.

더 중요한 것은 돌아온 아들을 맞이한 아버지의 모습이다. 아버지는 멀리서 아들을 보고 달려가 그를 끌어안았으며,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겼다. 아들은 자신을 품꾼의 하나로 받아 달라고 말하려 했지만, 아버지는 그를 품꾼의 자리로 돌려보내지 않았다. 잃었던 아들을 다시 아들로 맞아들였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회복되었고, 아들로서의 지위가 다시 확인되었다.

우리의 회개도 이와 같아야 한다. 우리는 단지 죄를 뉘우치는 사람으로 머물러서는 안 된다. 하나님 아버지를 떠났던 자리에서 돌이켜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한다. 우상과 자기중심과 불순종을 내려놓고, 아버지께 돌아온 아들로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 하나님께 돌아간다는 것은 두려움 속에서 종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용서와 사랑 안에서 자녀의 자리로 돌아가 다시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돌아가자”는 말에는 회개와 함께 회복의 뜻이 담겨 있다. 죄에서 돌아서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 돌아가야 한다. 잃었던 관계를 회복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를 다시 찾으며, 아버지의 뜻에 따라 살아가야 한다. 이것이 이 책이 말하는 회개의 궁극적인 방향이며 회복의 출발점이다.

이 책의 첫 질문은 결국 하나였다. 누가 하나님의 자리에 서 있는가.

아랏의 산당에서 시작된 그 질문은 이스라엘의 역사와 한국교회의 신사참배, 해방과 분단, 교회의 회개와 화해, 복음통일과 세계선교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지나 여기까지 왔다. 그리고 이 책의 마지막 답 역시 하나다.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여러 가치 가운데 하나가 아니다. 국가와 민족과 교회와 선교 사이에서 필요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하나의 수단도 아니다.

하나님은 정치적 구호가 아니며 우리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불러내는 이름도 아니다. 하나님은 주이시며 교회의 머리이시고 역사의 주인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속한 첫 자리를 사람과 국가와 이념과 조직과 자기 자신에게 내어주어서는 안 된다.

이제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아야 한다. 사람은 사람의 자리로, 국가는 국가의 자리로, 교회는 교회의 자리로, 선교는 순종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우리 자신은 하나님 아버지께 돌아온 자녀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그 모든 것의 첫 자리에는 하나님을 모셔야 한다. 산당을 허물고 하나님께 돌아가 예배를 회복하고 말씀에 순종하며, 회개에서 화해로, 화해에서 섬김으로, 섬김에서 세계선교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나 회개도, 화해도, 통일도, 세계선교도 그 자체가 마지막 목적은 아니다. 그 모든 것의 중심은 오직 하나님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 그것이 이 책이 마지막까지 말하고자 하는 중심이다. 산당을 허물고 하나님께 돌아가자. 그리고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

번호     글 제 목 작성일
60 아랏의 산당에서 시작된 질문, 다섯 권의 책이 되다 ―「교회살리기 프로젝트」5권 완간을 앞두고 ― 09-21 12:26
59 교회 살리기 프로젝트』 출간 마무리 단계 소식 09-06 17:04
58 맺는말 ― 산당을 허물고 하나님께 돌아가자 09-03 15:33
57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 들어가는 글 09-03 15:31
56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 - 목차 09-03 14:45
55 8·15 경축사 - 국민이 주인인 대한민국 ― 8월 15일을 ‘국민주권 건국절’로 기억하자 08-15 11:11
54 본연합회의 8.15 광복절 기념예배를 올림픽공원에서 드립니다. 08-15 10:48
53 교회가 살아야 나라가 산다_포스터 08-05 21:34
52 목회자들이 책을 읽지 않습니다. 08-05 21:34
51 한국교회와 목회자 여러분께 묻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죽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교회가 살아야 나라.. 08-05 21:33
50 교회는 죽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교회가 살아야 나라가 산다』입니까? 08-05 21:32
49 『교회가 살아야 나라가 산다』 이 책을 읽지 마십시오. 이미 답을 알고 계시다면... 읽지 않으셔도 됩니다.. 08-05 21:32
48 한국교회에 묻습니다. 교회는 죽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교회가 살아야 나라가 산다』 입니까? 08-05 21:31
47 『교회가 살아야 나라가 산다』 제2권 각 장·절 전체 목차 08-05 21:30
46 『교회가 살아야 나라가 산다』 제1권 각 장·절 전체 목차 08-05 21:29
45 『교회가 살아야 나라가 산다』 출간 안내 08-05 21:29
44 6·3 선거 신뢰 위기 특집] • 국민의 한 표와 교회의 양심 - 06-27 21:49
43 지방선거 관련 긴급 시국 성명서(3) 06-27 21:46
42 지방선거 관련 긴급 시국 성명서(2) 06-27 21:46
41 지방선거 관련 긴급 시국 성명서(1) 06-27 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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